천년의 쉼터 마음의 고향 강릉 보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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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 낭원대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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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 낭원대사 탑비

보현사 낭원대사 탑비(塔碑)


보현사에 있는 고려 초기 승려 개청(開淸)의 탑비(塔碑)로,
보물 192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의 원명은 ‘고려국명주보현산지장선원낭원대사오진탑비'
(高麗國溟洲普賢山地藏禪院朗圓大師悟眞塔碑)이다.


개청은 930년 9월 24일에 96세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입적한 지 5일 뒤인 28일에 보현사에서 300보쯤 떨어진 서봉(西峰) 석실(石室)에 장사를 지냈다. 신경(神鏡)·총정(聰靜) 등의 제자와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가르침을 사모하여 여러 번 표(表)를 올려 시호와 탑호를 내려줄 것과 비문을 찬(撰)해 달라고 조정에 아뢰었다.
10년 뒤 태조가 삼한(三韓)을 평정한 뒤에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도록 허락하면서 최언위(崔彦撝)에게 비문을 찬하도록 하였다. 글씨는 명서예가인 구족달(仇足達)이 썼으며, 각자(刻字)는 임문윤(任文尹)이 하였다.

비석의 귀부는 네모난 대석(臺石) 위에 놓여 있는데, 머리는 용머리 같이 조각하였다.
귀갑(龜甲)은 6각형의 벌집모양으로 표현되었다. 등 중앙에 구름무늬로 장식한 높은 비좌(碑座)를 마련하고 비신(碑身)을 세웠다. 비신의 상단(上端)에는 앙련(仰蓮) 받침이 있고, 이수(螭首)는 구름 가운데 쌍룡(雙龍)이 여의주(如意珠)를 다투는 모습인데 실감나게 투각(透刻)하였다.
이수 중앙에 편구형(扁球形) 복발(覆鉢)과 1단의 보륜(寶輪)을 갖추고 그 위에 화염(火焰)에 쌓인 모양의 보주(寶珠)를 얹었다.
비신(碑身)에는 개청의 행적(行蹟)과 보현사의 중창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개청은 835년에 지방세력가의 아들로 태어나 25세에 화엄사(華嚴寺)에 출가해 교학(敎學)을 익혔다. 26세에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굴산문(掘山門)의 개조(開祖)인 범일(梵日)의 제자가 되었다.
범일이 입적한 후 굴산사(掘山寺)를 지켰으나 자주 초구(草寇)들의 침입을 받았다. 이때 알찬(閼飡) 민규(閔規)의 도움으로 보현산사(普賢山寺)로 옮겼다. 지명주군주사(知溟州軍州事)인 왕순식(王順式)의 협조도 받았고, 경애왕(景哀王)이 국사의 예(禮)를 표하였다. 930년 보현사에서 입적하였다.

보현사낭원대사탑비 석문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普賢寺朗圓大師悟眞塔碑)

  • 高麗國溟州普賢山地藏禪院故 國師朗圓大師悟眞之塔碑銘幷序」
  • 太相檢校尙書前守執事侍郞左僕射兼御史大夫上柱國知元鳳省
  • 事賜紫金魚袋臣崔彦撝奉 敎撰」
  • 沙湌檢校興文監卿元鳳省待 詔臣仇足達奉 敎書」
  • 原夫鷲頭巖上世雄開立敎之宗鷄足山中迦葉表傳心之旨則知認於三佛知有心王觀空而其道希夷見性而本源淸淨繇是西從天竺東届海隅至人」
  • 則早綰眞宗禪伯則曾尋玄契驪壑探珠謂傳黃帝之珠鵲溪拾印如得法王之印於是徇虛失實遐刼而久滯凡間捐妄歸眞刹郍而俄登佛位」
  • 大師諱開淸俗姓金氏辰韓鷄林人也其先東溟冠族本國宗枝祖守眞蘭省爲郞栢臺作吏考有車宦遊康郡早諧避地之心流寓喙鄕終擲朝天之志」
  • 母復寶氏魂交之夕忽得休祥神僧欻自空來立於階下懷裏出木金雙印示之曰何者要之母氏脉脉無言其僧卽留金印而去覺後方知有娠因斷葷辛」
  • 肅設仁祠虔修佛事以大中八年四月十五日誕生 大師面如滿月脣似紅蓮纔有童心靜無兒戱八歲而初爲鼓篋十年而暗効橫經甘羅入仕之年學」
  • 窮儒典子晋昇仙之歲才冠孔門此時特啓所天懇求入道謂曰思前夢宛若同符愛而許之難拒先度是以卽爲負笈兼以擔書旣持浮海之囊遂落掩」
  • 泥之髮尋師於華嚴山寺問道於正行法師法師知此歸心許令駐足其於師事俻盡素誠志翫雜華求栖祇樹高山仰止備探鷲嶺之宗學海栖遲勤覽猴」
  • 池之旨大中末年受足戒於康州嚴川寺官壇旣而忍苦尸羅忘勞草繫傷鴨之慈心愈切護鵝之慜念彌深守夏己闌歸本寺再探衆典以導群迷超」
  • 懽喜之多聞邁顔生之好學此時遠聞蓬島中有錦山乘盃而欻渉鼇波飛錫而尋投鹿菀栖禪之際偶覽藏經披玉軸一音得金剛三味十旬絶粒先修正」
  • 覺之心三歲食松冀證菩提之果勤參之際忽有老人瞻仰之中飜爲禪客粲然發玉晧尒垂霜謂 大師曰師宜亟傍窮途先尋崛嶺彼有乘時大士出世」
  • 神人悟楞伽寶月之心知印度諸天之性大師不遠千里行至五臺謁通曉大師大師大師曰來何暮矣待汝多時因見趍庭便令入室心深求法禮事師甚」
  • 一栖道樹之旁幾改階蓂之序所以始傳心印常保髻珠不出巖巒唯栖雲水 大師年德皆至耄期不任極倦誨人兼疲看客敎禪師事同法主勤接來徒」
  • 牛頭添上妙香之塵尾代玄譚之柄可謂猶如洪州大寂地藏▨誘引之門有若魯國宣尼子夏代師資之道者矣文德二年夏 大師歸寂和尙墨巾倍增」
  • 絶學之悲恒切忘師之恨所以敬修寶塔遽立豐碑兼以常守松門幾遭草寇詰遮洞裏惟深護法之懷堅操汀邊志助栖禪之懇爰有當州慕法弟子閔規」
  • 閼飡欽風志切慕道情深早侍禪扉頻申勤款仍捨普賢山寺請以住持 大師對曰深感檀那有緣則住逡巡入便副禪襟廣薙丘原遐通道路又以高」
  • 修殿塔逈啓門墻來者如雲納之似海深喜吉祥之地慧月當軒共依功德之林慈雲覆室亦有知當州軍州事太匡王公荀息鳳毛演慶龍額呈祥趍理窟」
  • 以採奇詣禪山而仰異人中師子扣山陰翫月之門天上騏驎投剡縣栖霞之舍 本國景哀大王聞 大師德高天下名重海東恨闕迎門遙申避席仍遣」
  • 中使崔暎高飛鳳詔遠詣鴦廬請扶王道之危仍表國師之禮此際太匡齊携僚佐直赴禪關共陳列賀之儀皆罄羣黎之慶况復隣州比縣典郡居官冠盖」
  • 相望道途不絶 大師此時蹔移慈盖來至郡城尊州師勤王讃邑人之奉佛川南止觀長流福慧之泉嶺外言歸仰見淸凉之月纔臻舊隱忽患微痾漸至」
  • 危虛知去矣以同光八年秋九月二十四日示滅於賢山寺法堂俗年九十有六僧臘七十有二于時山崩海渴地裂溪枯道俗悲哀人天感慟門人不」
  • 勝追慕國士徒切恨嗟其月二十八日號奉色身假于當寺西峯石室去寺三百來步 大師功成億刧運値千年神通則龍樹推變化則馬鳴讓美故得」
  • 紹興三寶降伏四魔道情早冠於燈蘭心路曾超於安遠所以欲出迷焚慧炬於昏衢之畔將超彼岸艤慈航於苦海之中可謂智慧無碍神心叵量一切」
  • 之導師生人之先覺者矣上足弟子神鏡聰靜越皛奐言惠如明然琳禪師等俱栖慧菀共守禪扄思法乳以年深想慈顔而日遠切恐鯨池灰起先憂陵」
  • 谷之遷鯨海塵飛忽恨歲年之往所冀記 大師之言說遠示無窮流吾道之祖宗傳於不朽由是門徒抗表頻扣 金門衆懇聞 天達於玉扆」
  • 今上聖文世出神武天資三駈而克定三韓一擧而齊成一統今則高懸金鏡照靑丘所以賑恤黎民已致中興運歸依釋氏皆披外護之恩以此錫諡」
  • 曰郞圓大師塔名悟眞之塔申命下臣式揚 高躅彦撝詞林末學禁菀微臣叨奉 綸言仰銘 禪德譚劉琨之山高海闊廬湛焉知美郭泰之龍聖龜神」
  • 蔡邕不愧重宣前義乃作銘云」
  • 奧哉正覺 利見迦維 傳心鷲嶺 立敎猴池 爰有至人 生於海裔 崛山尋師 潛傳玄契 賢岫領衆 顯示眞宗 高懸法鏡 逈掛洪鐘」
  • 方忻宴坐 忽歎歸滅 日慘雲愁 天飜地裂 大君悲咽 門下感傷 燈傳雪巇 塔聳雲崗」
  • 天福五年七月三十日立   刻字任文伊」
  •   
  • (陰記)
  • 院主僧 純乂」 典座僧 釋超」
  • 都維那 靈寂」 史僧  弘信」
  • 當州都令佐丞 王乂」
  • 執事郞中 俊文」執事郞中 官育」
  • 員外   金乂」色執事  仁悅順忠」

해석

  • 고려국(高麗國) 명주(溟州) 보현산(普賢山) 지장선원(地藏禪院) 고(故) 국사(國師) 낭원대사(朗圓大師) 오진지탑(悟眞之塔)의 비명과 아울러 서문(序文).
    태상(太相) 검교상서(檢校尙書) 전수집사시랑(前守執事侍郞) 좌복야(左僕射) 겸어사대부(兼御史大夫) 상주국(上柱國) 지원봉성사(知元鳳省事)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최언위(崔彦撝)는 왕명을 받들어 짓고, 사찬(沙湌) 검교흥문감경(檢校興文監卿) 원봉성대조(元鳳省待詔) 신(臣) 구족달(仇足達)은 교지(敎旨)에 의하여 쓰다.
    살펴보건대 영취산 정상에서 세웅(世雄)께서 입교(立敎)의 종(宗)을 열었고, 계족산(鷄足山)에서는 가섭존자가 전심(傳心)의 종지(宗旨)를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삼불(三佛)이 모두 심왕(心王)을 깨달았음을 알겠다. 공(空)을 관찰하지만 그 도(道)는 희이(希夷)하고, 불성(佛性)을 보편하나 그 본원(本源)은 청정하니, 이로 말미암아 불법(佛法)이 서쪽 천축(天竺)으로부터 동방(東邦) 곧 해우(海隅)까지 이르러 왔다. 지인(至人)은 일찍이 진종(眞宗)을 관철하였고, 선백(禪伯)은 남들보다 먼저 현계(玄契)하기를 구했다. 여학(驪壑)에서 구슬을 찾는 것은 황제(黃帝)의 구슬을 전하는 것이고, 작계(鵲溪)에서 법인(法印)을 습득한 것은 마치 심왕(法王)의 심인(心印)을 얻은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헛된 망상을 따라가고 실(實)을 잃어버리면 하겁(遐劫)을 지나도 범간(凡間)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망(妄)을 버리고 진(眞)으로 돌아가면 찰나(刹那)에 문득 불위(佛位)에 오르게 된다. 대사의 휘(諱)는 개청(開淸)이요, 속성은 김씨니, 진한(辰韓)의 계림(鷄林)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동명(東溟)의 관족(冠族)이며, 본국(本國)의 종지(宗枝)였다. 할아버지는 수정(守貞)이니 난성(蘭省)의 낭(郞)과 백대(栢臺)의 리(吏) 등을 역임하였고, 아버지의 이름은 유차(有車)로 강군(康郡)에서 벼슬을 지냈고 일찍부터 산간으로 은거할 생각에만 가득 차 있어 궁벽한 시골로 유우(流寓) 훼향(喙鄕)하였으므로 마침내 나라와 임금을 향한 뜻은 던져 버렸다. 어머니는 복보씨(復寶氏)로 어느 날 밤 혼교(魂交)에 홀연히 아름다운 상서를 얻었으니 갑자기 신승(神僧)이 허공으로부터 내려와서 뜰 아래에 서서 품안에서 금(金)과 나무로 만든 도장 2개를 꺼내 보이면서 하는 말이 “둘 중에 어느 것이 필요한가”하였다. 어머니는 맥맥(脈脈)히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니, 스님이 곧 금인(金印)만 남겨두고 갔다. 어머니는 꿈을 깬 후 비로소 임신한 것을 알았다. 그로부터 오신채(五辛菜)와 어육(魚肉)은 모두 끊고, 엄숙하게 인사(仁祠)를 시설하고 불사(佛事)를 닦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이와 같이 태교와 공덕을 닦다가 만삭이 되어 대중(大中) 8년 4월 15일에 탄생하니, 대사의 얼굴이 마치 만월(滿月)과 같이 단정하고 입술은 홍련(紅蓮)과 같았다. 어릴 때부터 조용하여 아이들과 함께 장난하는 일이 없었으며, 8살 때 학당에 가서 공부를 시작하였고, 10살이 되어서는 배운 것을 모두 책을 덮어놓고도 암송하게 되었다. 감라(甘羅)가 입사(入仕)하는 나이에 이미 유전(儒典)을 다 배웠고, 자진(子晉)이 신선의 도리를 찾아 떠나려는 연령에는 그의 재주와 학문이 공문(孔門)에서 으뜸으로 추앙받았다. 이 때에 큰 뜻을 품고 소천(所天)에게 여쭈어 입산수도를 하도록 허락해 주실 것을 간청하였더니, 대답하되 “전일(前日) 태몽을 생각하니 완연히 맞는 일이다”라 하면서 사랑하지만 마지못해 허락하고, 그의 뜻을 막지 않았다. 그리하여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집을 떠나 절을 찾았다.
    이미 부해지낭(浮海之囊)을 수지(受持)하였으니, 드디어 머리털을 깎아 진흙에 떨어뜨렸다. 스승을 화엄산사(華嚴山寺)에서 찾아 도(道)를 정행법사(正行法師)에게 물었다. 법사는 스님의 깊은 신심(信心)을 알고 머물 것을 허락하였으니, 스님은 스승을 모시면서 정진(精進)함에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잡화경(雜華經)을 배우고자 뜻을 정하고, 강원에 입방(入榜)하여 경전을 연구함에 마치 고산(高山)처럼 앙모하여 취령(鷲嶺)의 종(宗)을 두루 탐구하였고, 학해(學海)에 서지(栖遲)해서는 후지지지(猴池之旨)인 불교의 역사까지도 부지런히 열람하였다. 대중(大中) 말년(末年)에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로부터 시라(尸羅)를 굳게 지켜 초계비구(草繫比丘)와 같이 하였고, 기러기를 상하게 할까 염려하는 자비심도 일으켰으며, 나아가서는 호아(護鵝)하는 민념(愍念) 또한 간절하였다. 제방(諸方)으로 다니면서 여름 안거(安居)를 하다가 뒤늦게 다시 본사(本寺)로 돌아가서 재차 여러 경전을 연구하고 군미(群迷)를 인도하였으니, 환희(懽喜)의 다문(多聞)을 능가하고 안생(顔生)의 호학(好學)보다 더 고매(高邁)하였다.
    이 때에 멀리 봉도(蓬島) 중에 금산(錦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술잔만한 작은 배를 타고 홀연히 오파(鼇波)를 건너 석장(錫杖)을 짚고서는 녹울(鹿菀)을 찾아가서 참선을 하던 중, 우연히 장경을 열람하다가 옥축(玉軸)의 일음교(一音敎)를 읽고 금강삼매(金剛三昧)를 성취하였고, 백일 동안 단식하면서 먼저 정각(正覺)의 마음을 닦았으며, 이어 3년간 솔잎만 먹고 보리(菩提)의 과(果)를 증득하려고 하였다. 부지런히 참선하던 중 홀연히 어떤 노인이 나타났다. 쳐다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선객(禪客)으로 변하였는데, 그는 선풍도골(仙風道骨)로서 찬란함이 마치 옥광(玉光)을 발하는 듯, 또한 흰 서리를 드리운 듯 하였다. 대사에게 이르되 “스님은 마땅히 빨리 이 길의 끝까지 가되 먼저 굴령(崛嶺)을 찾아가시오. 거기에는 시대를 탄 대사이며 세속을 벗어난 신인(神人)이 계시니, 능가보월(楞伽寶月)의 마음을 깨달았고, 인도제천(印度諸天)의 종성(宗性)을 모두 통달하였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그 길로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오대산에 이르러 통효(通曉)대사를 친견하였다. 대사가 말씀하되 “어찌 그리 늦었는가. 오랫동안 너를 기다렸다”하면서 뜰 앞으로 다가옴을 보고 곧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법(法)을 구하는 마음이 깊고 돈독하여 스님을 극진히 모시면서 한결같이 곁에서 정진하였으니, 계명(階蓂)의 계절이 여러 번 지나갔다. 그리하여 심인(心印)을 전해 받고 항상 계주(髻珠)를 보호하여 산에서 나오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운수(雲水)에서 서지(栖遲)하였다. 대사의 나이가 이미 모기(耄期)에 이르렀으므로 극히 권태로운 일은 맡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학인을 지도하는 일도 할 수 없었다. 개청(開淸)스님이 찾아오는 학인들에게 선을 가르치니 법주(法主)와 같이 섬겼으며 부지런히 학도(學徒)를 제접하였으니, 우두(牛頭)는 상묘(上妙)의 향공양을 받았고, 주미(麈尾)는 현담(玄譚)의 말자루를 대신하였다. 마치 홍주(洪州)와 대적(大寂)과 지장(地藏) 등이 지도하는 문풍(門風)과 같았으며, 노국(魯國)의 선니(宣尼)와 자하(子夏)가 사자(師資)의 도를 대신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문덕(文德) 2년 여름에 통효대사가 입적하니, 대중들은 모두 검은색 두건(頭巾)을 썼으며, 절학(絶學)의 슬픔이 배나 더하였고, 스승을 잃어버린 아쉬움 또한 더욱 간절하였다. 그러므로 정성을 다하여 보탑(寶塔)을 수축하고, 급히 비석을 세워 항상 송문(松門)을 수호하였으며, 여러 차례 초구(草宼)들의 동구(洞口) 차단을 크게 힐책하였다. 더욱 호법하는 마음이 깊었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정변(汀邊)의 경치를 굳게 지키고, 뜻은 서선(栖禪)에 간절한 마음을 도왔다. 이 때 명주(溟州)의 모법제자(慕法弟子)인 민규알찬(閔規閼湌)이란 사람이 스님을 흠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고, 도(道)를 사모하는 뜻 또한 돈독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선비(禪扉)를 후원하면서 자주 찾아가 친견하고 법문(法門)을 들었으므로 이에 보현산사(普賢山寺)를 희사하여 주지(住持)하도록 청하였더니, 스님께서는 단나(檀那)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고, 인연이 있어 이루어진 곳으로 가서 주석(住錫)하리라하고 받아들여 종래(從來)로 주지(住持)를 하지 않겠다고 한 마음을 바꾸어 곧 그 곳으로 나아갔다. 그 곳이 선객(禪客)들이 살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초목을 베어내고는 둔덕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 통로를 개설하였으며, 또 높이 전탑(殿塔)을 수축하는 한편 담장을 치고 대문을 크게 열어 회상(會上)을 차리니, 문법대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대중은 바다와 같이 많았다. 길상(吉祥)의 도량이므로 크게 기뻐하였고, 지혜의 달이 문 앞을 비추므로 함께 공덕(功德)의 숲을 의지하였으며, 자비의 구름 또한 자욱이 지붕을 덮었다. 또한 당주(當州)의 군주사(軍州事)를 맡은 태광(太匡) 왕공(王公) 순식(荀息)이 봉모(鳳毛)로써 경사스러움을 나타냈고, 용액(龍額)으로는 상서를 드러냈다. 이굴(理窟)에 나아가서는 기묘(奇妙)함을 탐구하였고, 선산(禪山)에 들어가서는 신이(神異)함을 앙모하였다. 인중(人中)의 사자(師子)가 산음(山陰)에서 완월(翫月)하는 문을 두드렸고, 천상(天上)의 기린은 섬현(剡縣) 서하(栖霞)의 집을 찾았다. 본국의 경애대왕(景哀大王)이 대사의 덕이 천하에 으뜸이고 명망이 해동(海東)에 두텁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아직 궁중으로 영접하여 피석(避席)의 예를 갖추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중사(中使)인 최영(崔暎)을 보내어 봉조(鳳詔)를 전달하고 앙려(鴦廬)로 초빙해서 왕도(王道)의 위급함을 부호(扶護)하는 방법을 물었으며, 국사의 예를 표하였다. 이 때에 태광(太匡)이 요좌(僚佐)를 거느리고 스님이 계시는 선관(禪關)으로 찾아가 함께 경하(慶賀)하는 예의를 베풀었으니, 이는 군려(群黎)의 경하를 극진히 한 것이거늘, 하물며 인주(隣州)와 비현(比縣)의 관속(官屬)들이 방문차 왕래하는 관개(冠盖)가 길로 이어져 끊어지지 아니함에 비유할 것인가. 스님은 이 때 잠깐 보현산사(普賢山寺)를 떠나 군성(郡城)에 와 있으면서 군주사(軍州師)가 나라에 충성함을 높이 격려하고, 읍인(邑人)들이 봉불(奉佛)함을 찬양하였다. 천남(川南)에서 지(止)와 관(觀)을 닦으니 복혜(福慧)의 샘물이 도도히 흐르고, 영외(嶺外)로 돌아옴을 말하니 청량(淸涼)의 밝은 달을 쳐다보는 것과 같았다. 그 후 다시 구은(舊隱)인 보현산 지장선원으로 돌아가자 곧 가벼운 병을 앓아 점점 위허(危虛)함에 이르렀으므로 머지않아 입적(入寂)할 것을 알게 되었다. 동광(同光) 8년 9월 24일 보현산사 법당에서 입멸(入滅)하시니, 속년(俗年)은 96세요, 승랍은 72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은 말랐으며, 땅은 갈라지고 시냇물도 고갈되었다. 도속(道俗)이 모두 슬퍼하고, 인천(人天)이 함께 애통해 하였다. 문인(門人)들도 추모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고, 국사(國士)들도 모두 통한에 잠겼다. 그 달 28일에 통곡하며 색신(色身)을 받들어 지장선원 서봉(西峰) 석실(石室)에 임시로 장사지냈으니, 절과의 거리는 약 300보쯤 되었다. 대사의 공덕은 억겁(億劫)을 흘러가고, 운(運)은 천년을 만나 신통은 용수보살도 양보하였고, 변화(變化)는 마명대사(馬鳴大士)도 사양하였으니, 삼보(三寶)를 소륭하고 사마(四魔)를 항복받았다. 불교를 전파하려는 원력은 가섭마등과 축법란보다 더 컸고, 마음가짐은 도안(道安)과 혜원(慧遠)보다 뛰어났다. 미혹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여 지혜의 횃불을 혼구(昏衢)의 언덕에 비추었고, 피안(彼岸)으로 건너게 하려고 자비의 배를 고해지중(苦海之中)에 항해하시니, 참으로 지혜는 걸림이 없고 신비한 마음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고 하겠다. 일체 중생의 도사(導師)이며 모든 사람들의 선각자(先覺者)이다. 상족제자(上足弟子)인 신경(神鏡)·정총(靜總)·월효(越皛)·환언(奐言)·혜여(惠如)·명연(明然)·홍림선사(弘琳禪師) 등도 함께 혜울(慧菀)에 있으면서 다같이 선경(禪扃)을 지키면서 스님의 법유(法乳)를 사모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고, 자안(慈顔)을 그리워함도 오래되었다. 경지(鯨池)에서 재가 일어나고, 능속(陵谷)의 변천으로 경해(鯨海)에서 먼지가 날아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로 변할까 염려하며, 세월 또한 유수(流水)와 같이 흘러감을 한탄하였다. 바라는 바는 대사의 말씀을 기록하여 멀리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보여주려 하며 우리 도(道)의 종지(宗旨)를 유통시켜 영원히 전하여 연멸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 이로 말미암아 문도(門徒)들이 여러 차례 표장(表狀)을 금문(金門)에 올려 대중의 간원을 옥의(玉扆)에 주달하였다. 임금님의 성문(聖文)은 세상에 뛰어난 신무(神武)이시고, 선천적으로 삼구(三駈)의 전략적 묘책을 타고나서능히 삼한(三韓)을 평정하여 일거(一擧)에 가지런히 일통(一統)을 이룩하였다. 이젠 금경(金鏡)을 높이 매어 달고 널리 청구(靑丘)를 비추어 항상 백성을 휼민(恤愍)히 여기며 중흥의 운을 이루었고 불교에 귀의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왕으로부터 외호(外護)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시호를 낭원대사(朗圓大師), 탑명(塔名)을 오진지탑(悟眞之塔)이라 추증하고는, 하신(下臣)에게 명하여 훌륭한 비문을 지어 스님의 고매한 행적을 선양(宣揚)하라 하셨으나, 언위(彦撝)는 사림(詞林)의 말학(末學)이며, 금완(禁莞)의 미신(微臣)으로서 외람되게 왕명을 받들어 선사의 도덕을 찬양하였다. 스님의 설법(說法)한 말씀은 곤산(琨山)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으니, 어찌 그 크고 아름다운 위업을 곽태(郭泰)에 견주어 말할 수 있으랴! 용성(龍聖)과 구신(龜神)이 채옹(蔡邕)에 부끄럽지 아니하였다. 거듭 앞에서 서술한 내용을 선양(宣揚)하고자 명(銘)을 지어 이르되,
    오묘하도다 정각(正覺)의 그 경지여!
    가비라국(迦毗羅國) 왕자(王子)로 태어나시어
    영취산에서 심인(心印)을 전해주시고 미후강변(獼猴江邊)에서 교단을 세웠네!
    여기에 위대하신 지인(至人)이 있으니 동국(東國)의 해예(海裔)로 태어났도다.
    사굴산의 범일(梵日)을 친견하고서 현계(玄契)를 이어 받아 견성(見性)하였네!
    보현산(普賢山)에서 대중을 지도하시고 학인(學人)에게 진종(眞宗)을 보여 주셨네.
    법(法)의 거울 더 높이 매어 달았고 홍종(洪鍾)은 높은 틀에 걸려 있도다.
    젊을 때는 기꺼이 연좌(宴坐)했지만 어느덧 열반의 문턱에 이르니
    태양과 구름 함께 처참해 하고, 하늘과 땅 또한 뒤집어졌도다.
    임금은 슬퍼서 오열하시고, 제자(弟子)들의 마음은 도려내는 듯,
    법등(法燈)은 사굴산서 전해 받았고, 탑비(塔碑)는 운강(雲崗)처럼 높이 솟았네.
    천복(天福) 5년 7월 30일 세우고, 임문윤(任文尹)이 글자를 새김.

    【음기(陰記)】

    [이 음기(陰記)는 『海東金石苑』과 『朝鮮金石總覽』에는 없고, 다만 『韓國金石全文』에만 있으므로 『韓國金石全文』에서 전재함]


    院主僧:純乂 典座僧:釋超 都維那:靈寂 史僧:弘信 當州都令佐丞:王乂 執事郞中:俊文 執事郞中:官育 員外:金乂 色執事:仁悅 順忠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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